【시마네현】‘뿌리’가 살아 숨 쉬는 시마네
JET 프로그램의 본격적인 시작은 일본 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니라 임기가 끝난 후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시마네와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06년 봄을 시작으로 해서 이제 곧 20여 년을 향해 가고 있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한국 분들께 시마네에 대해 소개할 기회가 주어지거나 시마네 친구들과 끈끈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마네에서 보낸 3년이라는 시간에 지지 않을 만큼 지금도 밀도 높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마네 이야기만 나오면 저도 모르게 '인연'이라는 단어에 힘이 주게 됩니다. 아마도 시마네가 인연을 맺는 신을 모시는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가 있는 ‘인연의 지역’이기 때문이겠지요.
일본신화의 무대 ‘이즈모타이샤
출처:시마네관광내비게이션
예전에는 큰 신사라는 뜻의 ‘다이샤’라고 불린 곳은 이즈모타이샤 한 곳뿐이었다고합니다. 일본의 고사기나 일본 서기 등에 서술되어 있는 일본 신화에는 이즈모타이샤와 관련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화의 무대가 된 지역이기에 시마네는 신들의 나라 또는 신화의 나라라고 불립니다.
이즈모타이샤가 가장 활기를 띠는 시기는 음력 10월입니다. 음력 10월은 일반적으로 신이 없는 달(神無月)'이라고 불리며 일본 전국의 달력에도 그렇게 표기됩니다. 하지만 일본 내 모든 신들이 이즈모타이샤에 모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유일하게 시마네에서만 음력 10월을 ‘신이 있는 달(神在月)’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일본 각지에서 모인 신들은 이즈모타이샤에서 사람들의 인연을 관장하는 회의를 연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는 전국에서 온 참배객들로 유독 붐비곤 합니다. 여기에서 인연이라는 것은 단지 이성 간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로부터 빚어지는 인연을 뜻합니다.
이즈모타이샤에서 산 부적을 손에 쥐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는 외국 관광객들의 얼굴을 보면 새삼 좋은 인연을 바라는 마음에는 국경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마네 사람들의 각별한 차 사랑 '마쓰에성 대차회'
10월이 되면 시마네의 현청소재지, 마쓰에시 각지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립니다. 괴담으로 유명한 작가 라프카디오 한(일본명: 고이즈미 야쿠모)의 이야기를 따라 둘러보는 '마쓰에 고스트 투어'와 시민들이 손수 만든 등으로 국보인 마쓰에성 일대를 환하게 밝히는 '마쓰에 수등로', 그리고 마을마다 큰 북을 실은 수레를 앞세워 힘찬 연주와 함께 행진하는 다니는 '마쓰에 도교레쓰'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본 3대 차 축제 중 하나인 '마쓰에성 대차회’는 빼놓을 수 없는 가을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도라 하면 내놓으라 하는 일본 유수의 유파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쓰에 각지에 차석을 마련합니다. 평소 진입장벽이 높다고 느껴질 수 있는 다도의 세계이지만 이 축제에는 매년 무려 15,000명이 방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정식 다실에서 즐기는 차도 물론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야외의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가을 향기 속에서 마시는 말차 역시 별미입니다.
차를 즐기는 문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화과자 문화도 발달하여 마쓰에는 일본의 3대 화과자 명소이기도 합니다. 매년 이 대차회를 위해 특별한 한정판 화과자를 선보이는 노포도 있어 그야말로 오감이 즐거운 축제입니다.
시마네는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어 같은 현이라고는 하지만 동부(이즈모 지역)와 서부(이와미 지역)은 상당히 분위기가 다릅니다. 마쓰에성이나 이즈모타이샤가 있는 동부는 고즈넉한 고상함이 있는 곳이고, 세계유산인 이와미긴잔 광산 유적이 있는 서부는 밝고 활기찬 분위기와 느긋함이 균형을 이루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활기는 이와미 지역의 가구라를 통해서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생동감 넘치는 '이와미 가구라'
'귀멸의 칼날' 등 인기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하는 가구라는 원래 신에게 봉납하기 위해 연주되는 가무를 말합니다. 일본 전국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가구라가 계승되고 있지만, 이와미 지역의 가구라는 지역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새로운 춤을 창조해 왔습니다. 주말이면 어디선가 가구라의 음악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이와미 가구라는 시기를 가리지 않고 연중 상연되고 있습니다. 인구 19만 명 남짓한 시골이지만 가구라 단체는 130여 곳에 다다를 정도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 가구라는 뗄 수 없는 생활 속의 전통문화입니다.
호화로운 의상과 활기 넘치는 연주로 눈과 귀를 사로잡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오로치(큰 뱀)와 불, 연기 등으로 박진감 넘치는 무대를 선보입니다. 더욱이 일본 신화를 소재로 한 스토리 라인은 간단명료하여 연령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지금은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 한국에서도 상연된 적이 있습니다. 이와미 가구라에 사용되는 탈과 의상 등은 모두 지역 특산인 종이로 만들어져 지역 산업과 함께 상생해 왔으며, 2019년 5월에는 일본 유산에도 등재되었습니다.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지역에서부터! 세계유산 '이와미긴잔'
한국의 제주도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2007년에는 시마네의 '이와미긴잔' 광산 유적도 세계유산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와미긴잔은 아시아 최초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광산 유산으로, 갱도 등 광산 유적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문화를 모두 포함하여 후세에 남겨야 할 유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전성기에는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 일본의 은이 대부분 이와미긴잔에서 생산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일본을 알린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600개 넘게 발견된 갱도에서도 당시의 번화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에도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세계유산 지구의 정겨운 풍경 속에서 지금도 지역주민들이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계승해 온 지역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행해졌고, 최근에는 다른 지역에서 젊은 세대의 이주도 증가하여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유네스코 ESD(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 리더십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마을의 지속가능한 노력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곳의 삶의 모습은 문화, 환경, 삶, 미래 등 다양한 관점에서 쇠퇴해 가는 지방 도시를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배움의 장’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마네(島根)라는 지명에는 '뿌리(根)'라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간의 시마네에서의 생활이 둘도 없는 인생의 경험으로 남게 된 것은 아마 현지에서 그곳의 '뿌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구 약 65만 명의 신칸센도 다니지 않는 지방 중의 지방 지자체이지만 그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뿌리 깊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자연과 상생하는 삶의 태도가 저에게 생각하는 힘과 위안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묶어버릴 수 없는 이토록 다채롭고 풍부한 지역 문화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JET프로그램을 통해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마네에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한반도와 예로부터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국면을 맞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국과의 교류에도 잠시 먹구름이 드리웠지만 2023년 10월부터 드디어 시마네까지 가는 인천-요나고 직항편(요나고 공항~마쓰에 시내까지 차로 약 40분)이 재개되어 사람들의 왕래도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다시 가까워진 만큼, 앞으로 시마네를 여행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이즈모 사투리로 감사를 전합니다.
‘단단(감사합니다)!’
(참고: 시마네현 공식 블로그 <인연이 단단>)
https://blog.naver.com/shimanekko
(끝)